“믿읍시다~, 믿읍시다~. 이후에 기회를 믿지 마라.” 몇 년 전 유행했던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 풍의 가락에 가사를 붙여 만든 이 곡은 “성도들아 이 시간은”이라는 제목의 찬송가다. 한국 교회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 곡을 흥겹고 절실하게 부르는 이곳은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위치한 한중사랑교회(담임 서영희 목사)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성도의 95%가 하얼빈, 연변 등지에서 온 조선족인 중국동포 교회다. 매주 800여 명의 중국동포들이 예배를 드리며, 등록 교인은 1만 여 명, 출석 교인은 2500-3000명에 이른다. 방문취업(H2) 비자를 들고 고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정하게 타향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구심점 없이 떠돌아다니는 동포들에게 한중사랑교회는 ‘중심교회’로 통한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전국에 흩어져 지내던 동포들이 주일 아침이면 중심을 향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저녁이면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중국동포 가사도우미에게 성경 지도 계기로 개척
한중사랑교회는 2001년 2월 늦깎이 신학생이었던 서영희 집사가 자신의 집에서 4명의 중국동포와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서 목사는 소문난 전도왕이었다.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5년 간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서 목사는 시어머니의 권유로 교회에 첫발을 디뎠으나 뇌수증을 앓는 어린 아들을 돌보느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중 사랑교회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모습-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1988년에 서울시 월계동에 있는 대광교회에 등록하면서부터 시작했어요. 제자훈련 교육을 받고 오신 담임목사님이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하셨는데, 1기 제자훈련생으로 들어가 2년 동안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어요. 훈련을 받고 보니 전도가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인 것 같아 전도대에 들어갔는데,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전도를 잘 못하겠더라고요. 기도 많이 하고 하면 된다고 해서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서 목사는 10년 동안 수많은 불신자를 전도했다. 어떤 해에는 180명을 전도했을 정도로 전도에 빠져 살았다. 성경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이 컸던 그는 2000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한다. 경기도 양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서 목사는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가 중국동포 가사도우미 손정숙 씨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주인이 하자니까 마지못해 따랐겠죠. 17년 동안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가사도우미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공허했겠어요. 신분 때문에 불안해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는데, 성경을 배우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었다며, 다른 가족에게도 성경을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하여 저희 집에서 손 씨와 남동생, 올케 2명까지 4명의 조선족과 예배를 드린 것이 한중사랑교회의 시작입니다.”
1년 가까이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예배를 드리던 서 목사는 한 조선족의 가정집에 정착하여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교인이 20-30명이 되자 방이 좁아서 더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때마침 가리봉오거리에 신축 중이던 오피스텔 2층에 방 3칸을 구입해 이전하고, 한중사랑교회로 이름했다. 지금은 1층의 상가 일부와 27개의 방을 추가 임대해 주중에는 숙소(사랑의집)로, 주일에는 예배실(8개 방)로 사용하고 있다.
철저한 제자훈련·친정 같은 사랑 넘쳐
지난 10월 14일 한중사랑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10시에 예배가 시작되는데, 8시 30분부터 성도들이 오기 시작해 서 목사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2층 예배실은 일찌감치 초만원이었다. 방 2개를 터서 만든 예배실에는 300여 명의 성도가 한 줄에 10명씩 길게 앉아 있었다. 의자 없이 방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다리를 펼 수도 자세를 바꿀 수도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8시부터 9시 40분까지 240명의 직분자 교육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예배 준비 찬송이 시작되었다.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보혈, 성령의 임재를 소리 높여 찬송하는 분위기가 70-80년대 한국 교회 부흥회를 떠올리게 했다.
-사랑의 집에서 동포들이 윳놀이 하는 모습-
-선교대학 제자반에서 공부하는 모습-
30여 분 간의 찬송이 끝나자 여 집사가 나와 강한 연변 사투리로 기도문을 화통하게 읽어 내려간다. 이어서 강단에 선 서 목사가 교사 출신답게 또박또박 천천히 목소리의 강약의 조절해 가며 설교를 했다. 때로는 예배실이 떠내려 갈 것 같은 큰 목소리로 웅변하듯 때로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교를 이어갔다. 떨리면서도 힘이 넘치는 그의 목소리에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동포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설교를 듣는 동포들도 힘이 넘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반응이 거의 없는 한국 성도들과 달리 이들은 서 목사의 질문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예화가 전부 자신들이 매일 겪는 구체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불법비자, 음주, 험담, 임금 체불, 동거, 공산당 신앙, 흡연, 담배꽁초 무단 투기 등 동포들의 생활 태도에서 사상 문제까지 동포와 관련된 일은 모두 예화에 등장한다. 동포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예화로 나오면 이구동성으로 “아이고”하며 혀를 차고, 바람 난 며느리를 설득하여 중국행 비행기를 타고 간 동포의 이야기가 나오면 “야~”하며 옆 사람과 손을 잡고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개척 초기부터 헌신적으로 서 목사의 사역을 돕고 있는 남편 이상부 장로는 “목사님이 곧 동포”라고 말한다. “목사님은 동포처럼 생각하고, 동포처럼 말합니다. 11년 동안 이 사역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동포보다 동포를 더 잘 알아요. 저도 지금까지 함께했지만, 동포들이 그래요. ‘장로님도 재미있게 잘해요, 70% 알아들어요. 그러나 목사님 말은 100% 알아들어요.’ 귀에 쏙쏙 박힌다고 합니다.”
예배 후에는 성경공부가 이어진다. 복음영접반에서 신앙기초반, 신앙확신반, 성경파노라마반, 성경통독반, 성경연구반, 말씀중심반, 중국어 성경반, 새신자반, 선교대학(제자반, 사역자반)까지 10개의 성경공부반이 토요일과 주일에 진행된다. 이 가운데 새신자반, 제자반, 사역자반은 서 목사가 직접 지도한다. 새신자반에서는 매주 40여 명의 새신자가 교육을 받는다. 한중사랑교회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신반을 수료해야 한다. 심지어 중국 교회에서 교역자로 사역했던 동포도 예외가 아니다. 새신자반에서는 4주 동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한중사랑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배우는데, 교재는 서 목사가 동포들의 수준에 맞게 직접 제작했다. 목양실 한쪽에 딸린 1평 남짓한 주방에서는 한국어에 서툰 동포들이 동시통역을 통해 서 목사의 강의를 들으며 교육을 받는다.
“제자훈련은 2년 과정이에요. 아시겠지만, 제자훈련은 큐티, 성경암송, 독서 등 과제가 많습니다. 사실 한국 성도들도 힘들어 하죠.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해오는지 모릅니다. 3D 업종에서, 가사도우미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빠지거나 숙제를 안 해오는 동포가 거의 없어요.” 지금까지 제자반은 232명, 사역자반은 99명이 수료했다.
제자훈련을 수료하고 직전 해의 예배 출석이 40주 이상인 사람은 집사로 임명된다. 매년 1월 임명한 후 6개월 뒤에 재임명한다. 재임명 기준은 ‘성수주일’이다. 중국동포들에게 성수주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하루 일당은 중국에서의 한 달 치 봉급과 맞먹기 때문에 매주 교회에 온다는 것은, 중국에서의 넉 달 치 봉급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교인들 사이에서는 “한중사랑교회에서 집사로 사는 것은 순교”라는 말이 돌 정도다. 처음에는 성수주일하지 못해 재임용에 탈락한 후 교회에 안 나오는 동포도 있었지만 지금은 200여 명의 집사가 모두 매주 성수주일한다. “집사 직분을 얼마나 받고 싶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집사들은 직분에 대한 긍지가 높습니다. 사역자반을 이수한 집사는 교구장(95개 교구)을 맡는데, 동포들에게 교구장은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물과 사관과 강한 기질이 신앙생활 어렵게 해
엄격하게 진행되는 교육이지만 동포들이 잘 참여하는 것은, 교육 과정 곳곳에 동포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있어 강력한 동기유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신자반 4주 과정을 마친 교인에게는 신용카드 모양의 ‘등록교인증’이 발급된다. 등록교인증이 있으면 사랑의집 생활비 10% 할인, 협약병원 진료 시 할인, 행사 우선 접수 등의 혜택이 있다. 제자반 졸업은 졸업 가운과 사각모를 쓰고 하며, 개인 사진이 가득 들어간 두툼한 개인 졸업 앨범을 만들어준다. 우수 졸업생은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시계를 부상으로 받는다. 사역반을 마치면 기념 배지를 달아 준다. 자기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동포들의 심리를 잘 활용한 것이다.
서 목사에 따르면 동포들이 신앙을 가지기 어려운 이유는 뿌리 깊은 ‘유물사관’과 ‘강한 기질’ 때문이다. 공산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물질’과 ‘공산당’ 이라고 한다.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서 목사는 공산당은 변하지 않는 절대 가치가 아니며, 공산당을 신앙해서는 안 되며 공산당과 하나님을 모두 신앙할 수는 없음을 강조한다. “신앙생활을 해도 유물사관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위에 물질과 공산당을 놓습니다. 유물사관이 가득한 동포들에게 눈에 보이는 유익이 없지만 하나님이 있음을 알게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또 30-40대 동포들은 덜하지만 문화혁명을 겪은 세대인 50-60대는 나를 방어하고 상대방을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팍팍한 생활은 이들의 기질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목회 초기에는 타협할 줄 모르고 매사에 부딪히고 싸우는 이들의 강한 기질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서 목사는 성경에 기초한 설교와 철저한 제자훈련으로 이들의 유물사관을 돌려놓고, 친정 어머니 같은 사랑으로 이들의 강한 기질을 녹였다.
한중사랑교회는 법무부지정 동포체류지원센터로서 복음 사역 외에도 사랑의집 운영, 상담, 행정업무대행, 의료진료 등 동포들의 체류 전반을 돕고 있다. 사랑의집은 동포들이 저렴하게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숙사로 현재 130여 명이 입주해 있다. 사랑의 집에 입주한 동포들은 교회의 모든 예배에 참석해야 하며, 교역자들이 인도하는 신앙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대개 6개월 정도 머무는데,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동포들이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시킨다.
변호사·노무사·행정사와 전문가의 출입국·법률·노무·고충·신앙 상담이 매주 진행되며, 체류 연장 및 변경·미용봉사·취업안내·컴퓨터교육·한국어교육도 매주 진행된다. 그리고 매주 30여 명의 전문의료진이 내과, 치과, 정형외과 등의 진료를 한다. 모두 무료다. 또 한중사랑동포잔치, 송년성탄축제 등을 연중 1-2회 마련하여 동포들이 즐기며 하나 되는 시간을 갖고 있다. 한중사랑동포잔치에는 매년 2,000명이 넘는 동포들이 참석한다.
-2010년 한중사랑동포 잔치 2,500여명의 중국 동포가 참석했다-
3,000명 가까운 등록 교인이 있고, 창립된 지 10년이 넘고, 행사를 하면 평균 2,000명이 넘는 교인이 동원될 정도로 단합이 잘 되지만 한중사랑교회는 아직 교회 건물이 없다. 작년 9월부터 교인들의 헌금으로 경상비를 충당하게 되었으니 자립한 지도 1년 밖에 되지 않는다. 서 목사는 동포들의 신앙이 확고히 서기 전에 헌금 부담을 느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헌금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의 자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헌금을 강조하고 있으며, 현재 십일조 생활을 하는 교인이 150명에 이른다. 지속적인 재정 자립과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예배당 마련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한중사랑교회의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비자가 만료되기도 하고, 교인들이 직장을 따라 전국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2, 3년마다 교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바뀐다는 점이다. 서 목사는 “하나님이 누구야 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고, 훈련해 쓸 만한 일꾼이 됐다 싶으면 중국으로 돌아간다”며 “일반 교회처럼 안정적인 교인층이 없으니 발버둥치지 않으면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사역한다”고 말한다.
중국동포는 통일의 교두보 확신해
한중사랑교회의 표어는 “한 사람의 새신자가 한 사람의 선교사로 양육되고 파송되는 교회”다. ‘한 사람’과 ‘선교사’는 한중사랑교회의 중요한 목회철학이다. 서 목사와 이 장로는 한중사랑교회가 동포들의 중심교회, 중국에서 들어온 동포가 공항에서 곧장 찾아 올 정도로 중국에 있는 동포들 사이에서 유명한 교회가 된 원인은 “한 사람 철학”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 교회는 한 사람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 정신을 11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어요. 장애인이 한 사람 들어오면 전담 교역자를 붙이고, 귀가 안 들리는 성도 한 사람을 위해 설교 자막을 내보냅니다. 서너 시간씩 차를 타고 오시는 분들인데, 왕으로 섬겨야죠.” 이 “한 사람 철학”은 동포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됐다. 한 달에 150만원을 받으며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교구장이 10만원씩 전화비를 써가며 기쁨으로 교구 식구들을 섬긴다고 한다. 머리에 유물사관이 가득하던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중국으로 돌아간 성도 중에는 가정교회를 개척한 집사도 있다. 흑룡강 성에 두 군데 교회를 개척했는데 20여 명의 동포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교회를 개척하지 않은 동포들도 선교사의 심정으로 돌아간다. 서 목사는 “동포들이 선교사의 심정으로 중국에 돌아가는 것은 북한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동포들은 북한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습니다. 북한을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동포들이 북한 선교와 통일에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